산동성관광국
산동성 여유 발전위원회 - (주)알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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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성관광국 한국 공식 사이트 입니다. 산동성의 문화, 여행, 사회 전반에 대한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산동성에는 현재까지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역사 문화적 인물들이 많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제(齊), 노(魯)의 두 나라가 산동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산동을 제노(齊魯) 고도라 부르기도 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중국 ‘어머니의 강 황하와 신성한 태산 주변으로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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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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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의 역사인물

산동성에는 현재까지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역사 문화적 인물들이 많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제(齊), 노(魯)의 두 나라가 산동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산동을 제노(齊魯) 고도라 부르기도 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중국 ‘어머니의 강 황하와 신성한 태산 주변으로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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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유가와 법가 사상을 창시한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공자(孔子)(기원전551~479년)입니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 노나라의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로써 산동성 중남부에 위치한 곡부(曲阜)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법보다 덕과 인(仁)으로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인도주의(人道主義)를 주창하였으며 3천여 명이 넘는 후학을 키워냈다고 하는데요.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 <논어(論語)>는 중국 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곡부의 공자유적 3공(공묘,공부, 공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산동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할 유서 깊은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맹자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받아 발전시킨 맹자(孟子)도 산동 사람으로, 맹자의 이름은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 자거(子車), 자거(子居)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생몰 연도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라는 맹자 자신의 말과, 맹자가 만난 제후들의 재위 연대를 고려할 때 그 활동 시기는 전국 시대 중엽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몰 연도에 관해서는 기원전 372~289년 설과 기원전 385~304년 설이 있습니다. 맹자가 태어난 곳은 당시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라는 소국이었습니다.

‘성인이 살았던 곳과 가깝다’는 맹자 자신의 말대로, 오늘날에는 산동성 제녕시 추성시에 있는 맹자묘는 곡부시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 등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묵자

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로서 산동성 조장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요.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를 주장했습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類 : 보편), ‘고'(故 : 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습니다.

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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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무는 자가 장경(長卿)이고,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 낙안(樂安, 지금의 산동성 빈주시 혜민현)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신흥 지주계급이라 할 수 있는 군사 전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선조 진완(陳完)은 원래 진(陳)나라(지금의 하남성 회양 일대) 공자로 내란 통에 제나라로 도망와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습니다.

손무의 할아버지 전서(田書)는 거(莒)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제서고금을 통해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손무와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은 물론 세계 군사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인물은 병가의 성인이란 뜻으로 ‘병성(兵聖)’ 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받고, 그 저작은 병가의 바이블이란 뜻의 ‘병경(兵經)’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군사 모략학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손무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모략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손자병법은 손무의 군사 이론서로 기원전 512년 손무가 오나라 장군에 임명되기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2천5백 년 이상 전이었습니다. 세계사에서 현존하는 군사 이론서 중에서 가장 이른 바이블 같은 저작입니다. 손자병법은 문장이 간결하고 생동감 넘치며, 내용은 넓고 깊습니다. 분량은 5천9백여 자에 지나지 않지만 군사과학 각 분야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산동성 빈주시 혜민에는 손무를 기리는 손자고원이 있습니다.

손빈

손빈은 제나라 사람으로 지금의 산동성 하택시 양곡·견성 일대에 해당하는 아(阿)·견(鄄)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춘추시대의 걸출한 군사 전문가로 훗날 ‘병성’ 또는 ‘무성’으로 추앙받은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제나라 위왕과 선왕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기원전 356년에서 기원전 319년 무렵에 활동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는데, 학업 성적이 늘 방연을 앞질러 그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업을 마친 뒤 방연은 위(魏)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혜왕(惠王)에 의해 장수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사무치는 원한에서 힘을 얻어 재기한 손빈의 생애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합니다. 복수의 힘을 최고 수준으로 승화시킨 앉은뱅이 군사의 열정은 ‘병법’으로 수렴되었습니다.

젊은 날 손빈은 동문수학한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빈형’이란 형벌까지 받아 앉은뱅이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빠졌으며 가장 비열한 인간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극복하고 사무치는 원한에서 힘을 얻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손빈은 절묘한 작전으로 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원수에게 당당하게 복수했으며, 자신의 군사 경험을 원숙한 병법으로 정리해냈습니다. 그의 삶을 반영한 『손빈병법』은 이런 점에서 『손자병법』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산동성 하택시 견성에는 손빈을 기리는 손빈 관광성이 있습니다.

강태공

본명 강상(姜尙)입니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략가로서 그는 문왕을 도와 주가 은을 물리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운 정치와 군사 방면의 전문가였습니다. 그 공으로 제 지역에 책봉되어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 동쪽 땅을 분봉받아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인물이자 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좌했던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사모략가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전쟁에서 시기는 절대적 요소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진정한 모략가 강상은 이 하나만으로도 ‘병가의 시조’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습니다.

산동성 치박시 린즈현에 강태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습니다.

제갈량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며, 낭야군 양도현(산동성 임기시 기남)에서 태어났습니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습니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습니다.

산동성 임기시 기남에 제갈량 문화관광구가 있습니다.